전 히가시노 게이고를 좋아했습니다.
‘용의자 X의 헌신’에 매료되어 ‘갈릴레오 시리즈’를 읽었고, ‘졸업’으로 가가형사 시리즈에 빠지며
그대로 거의 모든 작품을 탐독했죠.
지금도 제 책장엔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 가장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아마 제 나이대의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쯤 히가시노에게 빠졌을 것입니다.
그의 책은 쉽게 읽히고, 무엇보다 재밌으니까요.
독서를 어려워하는 사람도 히가시노의 책은
첫장을 붙잡는 순간 마지막 문장까지 자연스럽게 흐르니까요.
히가시노로 책에 빠진 사람은
그 뒤 두 부류로 나뉩니다.
그에게서 책 자체의 매력을 느껴
열렬한 독서광이 되는 사람.
그리고 히가시노만큼 쉽게 읽히는 책을 찾지 못해
결국 책으로부터 다시 멀어지는 사람.
전 전자였습니다.
그 뒤로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어댔죠.
그러다보니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끌어낸 몰입도는 그의 순수한 능력이기도 하지만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가 가진 힘이기도 하다는 것을요.
현실에선 마주치기 힘든 사건이 일어나고
극이 진행되는 내내 ‘수수께끼’를 쥐고 있으며
마지막엔 모든 것이 밝혀지는 카타르시스.
책을 쥔 손을 놓지 못하게 하는 힘을
‘추리 소설’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 ‘독서의 슬럼프’에 빠질 때면 추리 소설을 읽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야기할 책 또한
그런 독서의 슬럼프 시기에 읽은 책입니다.
바로, ‘기만의 살의’입니다.

이 책은 2021년 11월 30일, 블루홀6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저자는 미키 아키코, 번역은 이연승 번역가께서 해주셨습니다.
작가인 미키 아키코는 도쿄대학 법학부를 졸업 후 60세까지 변호사로 활동하다 은퇴한 후
2011년부터 집필을 시작한, 특이한 이력을 가진 작가입니다.
한국에 번역된 책은 아쉽게도 이 책 뿐이지만, 지금껏 꾸준히 집필 활동을 해오신 것을 보면
이 책이 마지막이 되리란 생각은 들지 않네요.
책의 시작은 자그마치 40년 전의 사건입니다.
한국은 물론이고 이젠 일본에서조차 어색한 ‘당주’.
‘니레’라는 집안의 당주였던 니레 이이치로가 어느날 돌연사를 당하고,
그 법요식을 위해 집안 사람들이 모두 모인 상황에서 소설은 시작됩니다.
집안의 가장이자 왕으로서 살았던 이이치로가 사라지자
가족의 일원들은 하나둘씩 자기의 욕망을 드러내죠.
그러던 중 사건이 터집니다.
이이치로가의 장녀인 니레 사와코가 차를 마시던 중 쓰러지는 것이죠.
누군가 커피에 독을 넣은 것이 의심되는 상황에서
또다른 비명소리가 들려옵니다.
바로 사와코의 양자인 요시오가 죽은 것입니다.
아이의 주머니에선 초콜릿 조각이 나온 상황.
경찰의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되고
사건은 의외로 순조롭게 풀려갑니다.
바로 사와코의 아내이자 요시오의 양아버지인 히루시게의 주머니에서
초콜릿 조각의 은박지가 발견된 것입니다.
히루시게는 적극적으로 혐의를 부정하지만
경찰은 이미 히루시게의 범행을 확신하는 상황.
지난한 법정공방이 예상되는 순간
히루시게의 불륜을 드러내는 사진이 발견됩니다.
히루시게의 신분은 확실하지만 파트너가 애매한 상황에
골머리를 썩는 경찰.
그런데 문득 히루시게가 모든 혐의를 인정하고 자수합니다.
그렇게 사건은 유야무야 일단락되고,
불쑥 40년이 흘러버립니다.
40년이 흐른 뒤 니레 가의 누군가에게 도착한 편지.
사건은 거기서부터 새롭게 시작됩니다.

‘기만의 살의’는 본격 미스터리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소설이 시작되기도 전에 등장인물을 정리해놓은 표부터
인물들의 배치도를 그려놓은 참고도까지.
본격 미스터리가 성행하던 시기의 추리소설에서 숱하게 보았던 것들입니다.
다만 등장인물이 너무 많은 데다가
대부분은 잠깐 나왔다 사라지기 때문에
읽다가 ‘얘가 누구였지?’ 싶어 앞장으로 돌아왔던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가족이라 서로 이름도 비슷하고
성으로 불렀다, 이름으로 불렀다 마음대로라
결국 가계도를 그려가며 책을 읽어야 했습니다.
다만, 지금 생각해보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대부분의 등장인물은 트릭을 위해 잠시 언급될 뿐 큰 역할을 하지 않거든요.
그러니 도저히 답답함을 참지 못하겠는 경우를 제외하곤
굳이나 등장인물을 세세히 파악하려 노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기서부턴 책의 내용이 등장합니다——————————
40년 전의 사건을 서술하는 첫 챕터와 사건의 내막을 밝히는 마지막 2 챕터를 제외하면
책의 대부분은 두 사람이 주고받는 편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런 전개 방식을 보이는 책을 ‘서간체’라 합니다.
서간이란 ‘안부, 소식, 용무 따위를 적어 보내는 글’을 뜻한다는데
유의어로는 서신이나 서찰등이 있다고 하는군요.
대표적인 사례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있습니다.
최근에 읽었던 책 중엔 ‘기묘한 러브레터’가 있습니다.
그 책도 마지막의 반전이 꺼름칙했던 책인데, 기회가 된다면 다룰 수 있으면 좋겠군요.
서간체 형식의 글이 추리소설에서 쓰이는 경우
명확한 장점과 단점을 지닙니다.
장점은 일반적인 서술방식이 아니기에 신선함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겠지만
단점은 트릭이 정형화된다는 점입니다.
그 정형화된 트릭은…앞서 언급했던 기묘한 러브레터나,
서간체는 아니지만 비슷하게 ‘특정인의 글’이 소설의 내용이 되었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악의’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소설의 내용이 전개되는 방식을 대략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첫 장의 내용만 간략하게 적어보겠습니다.
첫 편지는 히루시게가 도코에게 보낸 편지로 시작됩니다.
그는 니레 가의 새로운 당주였지만
아내와 아들의 살해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습니다.
원래라면 살인이 선고되어야 마땅하지만
자수한 데다가 죄를 뉘우친 점이 인정되었는지
첫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죠.
히루시게는 항고를 하지 않고
40년만에 모범수로 풀려납니다.
사회에 나온 히루시게는 즉시 도코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편지에서 밝히기를 자신과 도코는 사랑하는 사이였으며
도코를 감싸기 위해 일부러 죄를 인정했다고 선언합니다.
감옥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사건을 반추했고
그 과정에서 한가지 결론을 이끌어냅니다.
그가 생각하는 사건의 범인은 ‘효도 유타카’
그는 요시오를 시켜 물엿으로 바닥에 비소를 감춰두었고,
입막음을 위해 요시오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편지는 도코가 히루시게에게 보낸 답장입니다.
그녀는 효도의 범행은 불가능했다고 이야기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범인의 정체를 서술합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몇 번의 편지를 더 주고 받는 과정에서
소거법으로 불가능한 범행 방식이 사라지고
서서히 결론으로 귀결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사건이 일어난 시기가 40년 전이라는 것입니다.
40년 전의 사건이니 서로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트릭을 설명하거나
누군가를 범인으로 모는 과정에 거리낌이 없지만
그만큼 맥이 빠지는 것도 어쩔 수 없거든요.
책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난 뒤
전 이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뭐?’
40년 전의 일입니다.
범인으로 몰렸던 인물은 형을 거의 채우고 나왔습니다.
그때의 관계자는 대부분 사고나 자연사로 죽었고,
범인이 밝혀진다한들 공소시효도 끝나버렸죠.
그러니 작가는 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소설을 끝내는데
왠지 모르게 끝맛이 찝찝한 방법이거든요.
굳이 이렇게 끝내야 했을까?
대체 이런 방법으로 누가 득을 보는 거지?
작가는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소설에서 일어나길 바랐다지만
결국 책을 읽는 것은 현실의 독자고
독자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생각해볼 수밖에 없거든요.
나라면 어땠을까?로 시작되는 공감.
그 공감의 부분에서 아쉬운 것이
오늘의 소설 ‘기만의 살의’입니다.
다만, 그것을 제외한다면 본격 미스터리에 입장에선 괜찮은 소설이었습니다.
변호사 출신의 작가이기 때문인지
트릭이나 감정선에 서술이 어딘가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관망하듯 지켜보듯 이어진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공감에서 유발되는 아쉬움도 그런 관점에서
장점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어찌되었든 그런 소설.
기만의 살의.
제 별점은 ★★★★☆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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